'조선왕조실록' 「선조신록」∙「선조수정실록」과 율곡 이이 '석담일기(경연일기)'등 역사기록에만 존재하던 조선 최초의 신문이자 세계최초의 활자조판방식 상업용 일간신문 '민간인쇄조보'이 444년 만에 새로운 도약을 위해 제3회 학술세미나를 12월 16일(목요일) 영천시립도서관 지산홀에서 개최한다.
조선 1577년 발행한 '민간인쇄조보'는 세계최초로 활자조판방식을 채택해 1650년 독일에 서 간행한 「아인코멘데 자이퉁 EinkommendeZeitungen」보다 73년, 1638년 중국에서 간행한 「저보(邸報)」보다 61년 앞서 최초의 활판신문을 만들었다. –
쉽게 만들 수 있는 나무활자를 이용해 조판 인쇄하는 방식으로 신문을 찍어낸 뒤 그 활자를 풀어서 계속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경제성과 상업성 신문 발행에 있어 신속성을 모두 갖춘 근대 신문사의 구조를 갖추었다..
임금의 나라인 조선은 성리학적 유교사회로 모든 정보를 지니고 있는 활자를 국가나 기관이 소유하고 있었다. 선조 10년 1577년 민간업자들이 의정부와 사헌부에 허가를 취득하여 정보전달체계인 활자를 이용하여 왕실이나 중앙정부의 소식을 매일 신속하게 전달한 우리나라 최초의 민간신문을 창간했다.
직원이 30명이나 되는 신문사로 상업용 배달까지 담당했다. 인기가 절정에 이르러 받아보는 사람들이 모두 좋아 했다. 손으로쓴 필사신문은 너무 어려워 보기가 쉽지 않았지만. 해서체로 잘 만들어진 인쇄조보는 글자를 알기만 하면 쉽게 읽어 낼수 있는 신문이었다.
1577년 8월에 창간하여 11월 28일 폐간 당하게 되는데 이유는 “신문이 사사로이 역사를 만든다.” 하여 선조에 의해 폐간을 당하게 된다. 제호는 조보(朝報)이며, 발행호수는 없으나 발행 날짜를 기록해 간행하였다.
당시 조선의 신문(민간인쇄조보)를 선조는 대역죄로 몰아 관련자 30명을 의금부에 하옥시켜 심한 고문을 한 후 멀리로 유배를 보내었다고 「선조실록」과 여러 기록은 전하고 있다.
당시에 사간원 사헌부 양사(兩司)와 의정부 관리들이 <민간인쇄업자>들을 구원하기 위해서 노력했으나 그 관리들 마저 퇴임시키는 큰 사건이었다.
인쇄조보는 신문(저널리즘)의 편집기능을 한껏 살려 신문의 첫 페이지에 당시에 중요한 역사의 한페이지를 실고 있다. 1면 왕실소식과 인사이동, 2면에는 당시의 행정부인 육조(六曹) 소식을 실었다. 사회면에서는 고급 수입차(마차) 금지령과 구제역으로 인한 국가사업의 지장에 따른 상황 등 다양한 기사가 실려 있다.
선조의 탄압으로 3~4개월만에 폐간의 운명을 맞이한 <민간인쇄조보>는, 발행자·메시지
(뉴스) · 독자 · 인쇄기술 등의 요소를 두루 갖추었던 바, 세계 최초활자조판방식 상업용 일간신문’으로 평가하는 관련세미나를 통해 독일보다 70여년 앞서 발행된 <민간인쇄조보>와 함께 세계 최초의 목판인쇄본(불국사 석가탑 사리공에서 발견된 <무구정광대다라니경>)과 세계 최초의 활판인쇄본(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하)>)과 더불어, 인쇄문화유산 선진대국으로 대한민국을 명실상부하게 부각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